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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모시

아름다운 우리의 혼 한산모시가 천년의 역사에서 깨어납니다.

서천군청

 

전통을이어가는 사람들

문정옥여사

  • 1928 .09.09 1남 1녀중 맡딸로 출생
  • 1948  한산면 지현리 김기태씨와 결혼
  • 1967 .01.16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보유자 지정
  • 1967 이후 '한산모시짜기' 기능 보존을 위한 후계사 양성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 문정옥

1967년 1월16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14호 ‘한산모시짜기’ 보유자 인정서를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 거주하는
문정옥(文貞玉-1928년 9월 9일생)이 받음으로써 우리나라의 미를 상징하는 여름 전통옷감 ‘한산모시’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모시풀 재배부터 모시짜기까지 일련의 전통기법은 숙련된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제작기술을 요하므로, 제작기술을 보호하고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이다.

당시 한산면과 인근 지역의 부녀자들 대개가 모시를 짤 수 있는 기능을 지녔고, 지역적으로 그와 같은 기술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한산모시짜기’ 중묘무형문화재 보유자로 문정옥이 선정 된 것은 모시짜기 솜씨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모시는 올이 가늘고 약하기 때문에 짤 때 실이 자주 끊어진다. 모시를 짜다가 끊어진 실을 있는 시간 또한 한필의 모시가 완성되는 시간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보유자는 모시가 끊어지지 않게 북만 얌전히 왔다갔다 하는 그런 기능을 터득하여 남들이 2필 짤 때 3필 이상을 짤 수 있었다.

모시짜기는

모시짜기와의 인연

워낙 고된 노동이라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일 중의 하나이다. 화양면으로 시집와서 본격적으로 모시를 짰던 보유자 어머니 역시 보유자에게 고생스러운 모시짜기를 가르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보유자는 어머니 어깨너머로 모시 째기, 삼기 등을 배우며 모시짜기에 어려서부터 관심을 보였다. 당시 보유자는 타고난 눈썰미로 수(繡)도 잘 놓고, 골무도 잘 만들어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

성정이 그러하니 모시짜기 역시 어머니의 만류에도 보유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모시를 짜다가 집안일을 돌보러 나가서 잠시 베틀을 비우면 어머니가 짜던 부분을 이어서 짜곤 하였는데 짜는 솜씨가 괜찮았는지 어머니로부터 나무람을 듣지 않았다. 한필모두 곱고 균일하게 짜여있지 않으면 상품가치가 떨어져 제값을 못 받게 되므로 어머니의 나무람이 없으니 잘 짰던 모양이다. 그 후 보유자의 어머니는 모시짜는 방법을 보유자에게 모두 가르쳐주셨고, 보유자가 모시를 짜서 처음으로 1필을 완성한 때가 16세 때의 일이었다.

이후 보유자는

모시짜기와 함께한 인생역전

보유자의 나이 21세 때 한산면 지현리로 시집가면서 한산모시짜기 전문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보유자의 시댁은 모시를 잘 짜는 사람에게 삮모시(모시를 대신 짜주고 삮을 받는 일)를 맡겼었는데, 보유자가 시집 온 이후에는 보유자가 다 짜기 때문에 남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어서 시어머니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당시 모시를 못짜면 며느리를 잘못 들였다 할 정도로 모시 잘 짜는 며느리들이 인기였다.

보유자가 시집오기 전. 가난하여 모시풀 재배할 밭도 없던 시댁은 모시장에서 태모시를 사다가 짜거나 삮모시를 주어 짜서 장에 내다팔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보유자는 집안에서 모시짜는 일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장에서 사온 태모시를 째고 삼아주면, 보유자는 날고, 매고, 짜는 일을 도맡아 했고, 시어머니나 시누이들은 보유자가 모시짜기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일과 들일을 맡아서 하였다.

보유자의 모시짜기 인생은 그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남편이 친정집에 가서 모시짜는 토굴을 보고 와서 반 지하로 토굴을 만들고 짚과 진흙과 돌을 섞어 벽채를 발라 지어 준 움집 속에서 남편이 손수 만들어 준 베틀로 모시를 짰다. 출산과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외에 오로지 습기찬 토굴에서 모시를 짜왔던 보유자는 625동란 중 친정으로 피난간 몇 일을 제외하고는 모시짜는 일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모시짜기에 좋은 계절은 여름인데, 여름엔 습기가 많아 움집에서 모시를 짜면 모시는 부들부들하고 끊어지지 않아 모시짜는데는 더없이 좋았다. 그러나 움집에 들어가서 짜는 사람은 바람한점 없는 밀폐된 공간의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신체적으로 무척 괴로웠다. 더위가 가시는 가을철은 그나마 더위 고생은 없지만 습기가 적어 실이 자주 끊어지기 때문에 잇느라 고역이었다.

무엇하나 편할 것 없는 ‘모시짜기’는 모시날기와 모시매기, 모시짜기 등의 과정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이 중 가장 어려운 공정이 모시매기인데, 모시매기는 모시짜기의 어려움에 견줄 정도로 힘든 과정이다. 지금이야 가스불로 적정온도를 유지하면서 매지만(가스불을 이용한 모시매기 또한 한여름 불 앞에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왕겨로 은근히 불을 지펴 왕겻불로 강약을 조절하면서 매야했다. 왕겨에 불을 피움으로써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에 눈물이 나고, 한여름 불앞에서 일하느라 땀이나고, 매기에 알맞은 온도를 맞추기 어렵고, 모시에 골고루 콩풀이 먹어 들도록 연신 솔질하느라 힘든 일이 모시매기다.

특히 모시매기에 알맞은 온도를 유지하면서 모시에 콩풀을 골고루 먹이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보유자와 같은 숙련된 장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작업인 것이다. 실 예로 삮모시를 주는 사람들은 모시매기부터 해달라고 주문한 것만 봐도 그 어려움을 알 수 있다.

몸이 무겁고 허리통증이 오는 늘그막에 찾아 온 지병. 첫아들 낳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모시짜기를 해서인지, 평생 음습한 움집에서 모시를 짜서 그런지 노년도 편치 못하다. 남편 살아생전에도 그랬지만, 20년 전 당뇨병으로 남편을 잃고 나서도 그렇게 몸을 혹사 시키며 모시를 짰기에 아들 셋 딸 둘을 건사하며 살아 온 인생. 평생을 모시짜서 자식 뒷바라지하였건만, 그래도 마음에 남는 건 자식들에게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어 자식들만 생각하면 애틋하다는 보유자이다. 5남매 모두가 시집장가 가서 잘 살고 있건만, 모시짜느라 자식들 보살핌에 소홀했던 것이 못내 아쉬운 보유자이다.

보유자의 인생에서

전통을 잇다

모시짜기를 뺀다면, 그의 인생은 없다. 그만큼 시집와서 일을 놓기까지의 삶은 모시짜기로 일관 하였다. 한때 농가의 부업으로 각광받았던 가마니짜기는 짜기도 편할뿐더러 환금성이 좋아서 모시 짜던 부녀자들이 가마니 짜기로 전업하였으나 보유자는 고집스럽게 모시짜기만을 일관해 왔다. 보유자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유자가 살고 있는 지현리는 모시를 짜기를 배우고자 하는 동네 아낙들이 더러 있었다. 보유자는 바쁜 와중에도 모시짜기를 배우고자 하거나 지도를 부탁하면 일부러 짬을 내어 지도를 하곤 했다. 특히 어려워하는 모시매기를 손수 시연해가면서 가르쳤는데, 말이 시연이지 모시 한필분량을 거의 매주다시피 했다. 이러한 수고에는 댓가도 없다. 그렇지만 동네 젊은 아낙들이 모시짜는 일을 배운다는 자체에 고무되어 기쁜 마음으로 모시짜기를 전수했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건만 누구네 집이 모시를 맨다는 소릴 들으면 궁금하여 들러보고 지도 또한 아끼지 않았다. 수십년을 한결같이 모시짜기로 일관한 인생. 진저리 칠 정도이기도 하였건만, 모시짜기라면 발 벗고 나서는 것을 보면, 보유자에게 있어서 모시짜기는 삶을 꾸리기 위한 궁여지책이 아니라 기꺼운 일이 아니었을까.

모시짜기에 열정과 애정을 쏟아 부어온 보유자의 일생, 10여 년 전, 얼음판에 미끌어져 허리를 다친 탓도 있지만 늙고 힘들어 5~6년 전, 모시짜는 일은 놓았다. 시집장가 가서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는 5남매 자식보다 그의 수제자 방연옥외 6명의 전수자가 한마을에 모여 살며 모시짜기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사실이 그에게 있어서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딸자식 중 하나라도 모시짜는 일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이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는 보유자는 손은 놓았지만, 마음으로 여전히 모시를 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