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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모시

아름다운 우리의 혼 한산모시가 천년의 역사에서 깨어납니다.

서천군청

 

전통을이어가는 사람들

나상덕여사

  • 1936년2녀 중 맏딸로 출생
  • 1953년000씨와 결혼
  • 1974년8월31일
    충청남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모시짜기' 보유자 지정

1974년 8월31일

모시짜기'로 일군 삶

충남 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은 나상덕 선생님은 한산면 동상리에서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당시 보유자 할머니가 모시 일을 하셨는데, 보유자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에게 모시를 째고 삼는 것을 배우면서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갔다 오면 할머니 곁에 앉아서 모시 째는 것을 따라 하곤 했는데 그것이 친구들과 노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그러던 중 초등학교 4학년 때 해방을 맞이하였고 해방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보유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모에게 모시 짜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때가 16세 되던 해였다. 이모에게 배운 모시 짜기로 가사를 돕던 보유자는 625사변이 끝난 후 그해 11월에 결혼을 하였다. 당시 보유자의 집안에 아들이 없어서 신랑감을 사위 겸 아들을 삼고자 데릴사위로 들였고, 5남매를 낳아 기르며 가난한 생활이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물려받은 땅도, 밭도 없는 보유자는 오로지 모시 짜기를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어린 5남매를 키우기 위해 낮 모시, 밤 모시 마다 않고 허리가 휘도록 모시를 짜서 장날에 내다 팔았는데, 당시 한번도 모시장을 거른 적 없이 부지런히 모시를 짰다. 장에 필모시를 내다판 걸음은 모시굿을 사다가 모시 짤 준비를 하고 사흘 낮밤을 모시 짜서 장날 필모시를 내다파는 일은 하루도 게으름을 피우면 모시를 내다팔 수 없기에 꾸준히 해야만 했다.

자식 뒷바라지 하며 부지런히 모시를 짜다보니 어느새 맏딸이 커서 어머니 일을 거들게 될 나이가 되었다. 보유자는 모시를 날 때나 맬 때는 남의 손을 빌렸는데, 딸이 그 일을 도울만큼 자라서부터는 딸과 함께 모시를 날고 매어 모시를 짜니 집안에서 혼자 모시 짤 때와는 힘들기도 덜하였거니와 자식이 커서 자신을 돕는 것을 보니 기쁘기도 하였다.

오로지 모시만 짜서 7식구 생계를 꾸려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유자가 그나마 힘을 덜 수 있었던 것은 보유자가 짠 모시는 세모시이고, 짜는 솜씨 또한 좋아서 장에 나가면 항상 높은 값을 받았다. 그리고 모시를 잘 짠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면서 멀리 지방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보유자의 집으로 모시를 직접 사러 오거나 모시를 짜달라고 삯모시 감을 가져오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모시 일감이

나상덕여사 사진3
모녀 모시를 짜다

많아서 혼자 모시 짜기를 했다면 소화를 다 하지 못하였겠지만, 맏딸이 어머니를 도와 모시 짜기를 거들어서 많은 힘이 되었다. 그러던 중 맏딸은 서울 인근에 직장을 구해서 돈벌러 가고 보유자는 다시 혼자가 되어 모시를 짜며 생활 했다.

보유자는 맏딸과 모시 짜던 시절이 그리웠는지 일 잘하고 있는 딸을 고향으로 불러들여 데리고 있다가 그동안 보아두었던 사윗감으로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청년에게 맏딸을 시집보냈다.

딸이 보유자와 가까운 곳에 시집보내면서 두 모녀의 새로운 모시 짜기 인생은 시작되었다. 시집갈 때 집에서 베틀을 가지고 간 딸은 시집가서도 모시를 짰다. 어머니가 매어놓은 모시를 집으로 가져다 짜기도 하고 모시를 날고 맬 때는 딸이 친정으로 와서 모녀가 사이좋게 모시를 날고 매었다.

맏딸은 보유자와 함께 모시 짜기를 하면서 낮에는 모시를 짜고 밤에는 인근 군산에 있는 야학을 다니면서 공부를 하여 고입자격 검정고시와 대입자격검정고시를 차례로 패스하면서 못 배웠던 한을 풀었다.

나상덕여사 사진4

어머니는 딸이 힘들이지 않고 대학입학자격 검정고시까지 패스하자 대학가기를 권유했으나 그 시간에 모시 짜는 기능을 더 연마하는 것이 낫다며 대학진학을 마다했다. 당신을 도우며 집안 일 하랴 동생들 돌보랴 초등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 진학은 꿈도 못꿔 본 딸을 생각하면 보유자의 가슴은 메어진다.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한산모시관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딸과 함께 모시 짜기에 여념 없는 보유자는 딸이 공부를 더해 한산모시짜기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일을 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면 바람이다. 딸도 이렇게 어머니 곁에서 모시를 짜다 보면 언젠가는 보유자 인정을 받을 것이지만, 딸자식 공부에 대한 미련은 아직도 남아 있다.